여성 복사, 남성 복사 그리고 사제직: 연결고리 찾기...



“내가 너희를 위해 남긴 거룩한 제사인 미사에서 여인들에게 제단에 서라고 명한 적도 없으며, 고위성직자가 되라고 명한 적도 없다. 사탄의 교회가 행하는 이런 관습을 나의 교회에 들이려 하고 있구나; 절대로 이 관습을 나의 교회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


“내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 어머니께서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내가 전능하신 아버지의 권능으로 여사제를 만들려 했다면 분명 첫 여사제는 나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사제들을 부르는 봉헌식 때 여인은 없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87. 10. 2






여성 복사, 남성 복사 그리고 사제직: 연결고리 찾기...


1 Peter 5, 2014. 9. 17 기사: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미사에서 복사로서 소녀들의 참여를 허용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소녀들이 복사로 봉사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경신성사성’(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CDWDS)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교황청은 소년들이 제대에서 봉사하는 고귀한 전통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매우 적절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전통은 사제 성소의 안정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복사들을 지원해야 할 의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복사에 대한 주제를 논의할 때 여전히 많은 감정이 오갑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과거에도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혼란과 오해가 매우 크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소녀 복사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로마 교회가 제대에서 소년이 봉사하는 것과 사제 성소 사이의 연관성을 항상 인정해왔다는 사실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복사에 대한 주제를 논의할 때 여전히 많은 감정이 오갑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과거에도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혼란과 오해가 매우 크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소녀 복사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로마 교회가 제대에서 소년이 봉사하는 것과 사제 성소 사이의 연관성을 항상 인정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2001년 경신성사성에서 보낸 서한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여성들이 제대에서 봉사하는 관행이 지역 사목 상황에서 진정한 사목적 유익이 있는지에 관하여, 신품성사를 받지 않은 평신도는 제대 봉사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목자들에 의해 그러한 봉사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교께서 제대에서 여성의 봉사를 승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실 경우, 신자들에게 이 혁신의 본질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초래되어 사제 성소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94년에 발표된 최초 성명서와 2001년 후속 성명서를 검토하면서, 존 줄스도르프 신부는 소녀들이 제대에서 봉사하도록 허용하는 관행을 규정하는 기준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했습니다:


* 교구 주교는 여성이 제단에서 봉사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다른 교구에서 여성의 봉사를 시행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교구가 반드시 그것을 시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 사제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미사에서 봉사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됩니다.

* 주교는 사제들에게 여성 봉사자를 두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 제대 봉사에 참여하는 소년들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소년들이 제대에서 봉사하는 것과 사제 성소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 어떠한 평신도도 미사나 다른 전례 예식에서 제대 봉사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쓴 바와 같이: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USCCB)는 2014년 사제 서품 대상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를 위해 조지타운 대학교의 사도직 응용연구센터(CARA)가 준비했으며, 전체 응답자 365명으로, 응답률은 77%라는 놀라운 응답률을 기록했습니다...


“올해 조사에 참여한 365명의 남성 가운데 무려 80%가 성장기 동안 복사(제대 봉사)였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비해, 독서자(성경 봉독)였던 비율은 52%에 불과했고, 청소년 사목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는 3분의 1도 되지 않았으며, 세계청년대회나 스투벤빌 청소년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 이는 겨우 15%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CARA가 이전에 실시한 조사들과도 일치하는 결과이다. 성장기의 일부 기간 동안 복사(제대 봉사)로 활동했던 서품 대상자의 비율은 2010년 70%, 2011년 71%, 2012년 75%, 2013년 67%였습니다.


수년간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 발표한 여러 차례의 성명과 해명들, 그리고 CARA가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USCCB)에 보고한 통계적 결과들을 바탕으로 볼 때,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두고 논쟁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 영상 클립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코인 주교는, 지금 시점에서 여성 복사(제대 봉사)의 참여를 중단하는 것은 소녀들에게 그들이 "2등 시민"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며, 이는 그들을 "식탁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례 안에 세속적이며 잘못된 평등과 참여의 개념을 끌어들이려는 이들이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봉사하는 것이 중요성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다르며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건전한 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것이 "금지된다"고 하면 곧 누군가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여기도록 세뇌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남녀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찬미함으로써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녀들을 복사(제대 봉사)에서 배제하는 것이 교회, 혹은 교회 안에서 소녀들의 역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본당에서 여성 봉사자 사용을 중단하였으며, 1962년에 발효된 전례서의 규정을 따르는 특별 미사 양식은 여성 복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많은 전통 성향의 본당들이 두 전례 형태 간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형(Ordinary Form) 미사에서도 여성 복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례적 정통성을 중시하는 본당들은 미사 참여와 신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당 좌석은 대가족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가정의 아들들이 제대에서 복사로 봉사하고 있다 해도, 어머니나 자매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마땅한 자긍심이 있고, 언젠가 그 가정에서 한 사람이 사제로 서품되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마저 담겨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신중한 고려와 솔직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미 제시한 지침과 이 관습의 기원 및 영향, 그리고 복사 봉사와 사제 서품 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살펴봐야 합니다. 사제 서품은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관에서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20년 된 관행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 관행이 신앙 분별과 사제 직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제로 연구하는 데에는 무관심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이런 징후들을 무시할만큼 여유가 없습니다. 사제 서품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의 지속적인 감소에 깊은 영향을 받을 다음 세대 가톨릭 신자들은 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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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ar Girls, Altar Boys and the Priesthood: Connecting the Dots...



"In the Holy Sacrifice that I left with you, I did not ask for women to be upon the altar, nor try to be a high priestess. They carry this on in the churches of satan; therefore, it shall not be carried on in My Church.

"When I had the Last Supper with the Apostles, My Mother was not present. If I had it in My power from the Eternal Father to make a priestess, I would surely have chosen My Mother; but, no, there were no women present at the first Dedication."

-The Bayside Prophecies

Jesus, October 2, 1987





Altar Girls, Altar Boys and the Priesthood: Connecting the Dots...


1 Peter 5 reported on September 17, 2014:


It has been twenty years since the Catholic Church officially permitted the use of altar girls at Mass. While extending this permission for girls to serve, the 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CDWDS) was also careful to state that:


“The Holy See wishes to recall that it will always be very appropriate to follow the noble tradition of having boys serve at the altar. As is well known, this has led to a reassuring development of priestly vocations. Thus the obligation to support such groups of altar boys will always continue.”


Two decades later, there is still a great deal of emotion encountered when discussing the topic of altar servers. I have written about this in the past, only to be surprised at the level of confusion and misunderstanding regarding the subject. Many who enthusiastically endorse altar girls simply ignore the fact that Rome has always recognized the connection between boys serving at the altar and priestly vocations.


In a 2001 letter from the 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the topic was further clarified:


“With respect to whether the practice of women serving at the altar would truly be of pastoral advantage in the local pastoral situation, it is perhaps helpful to recall that the non-ordained faithful do not have a right to service at the altar, rather they are capable of being admitted to such service by the Sacred Pastors…


“Therefore, in the event that Your Excellency found it opportune to authorize service of women at the altar, it would remain important to explain clearly to the faithful the nature of this innovation, lest confusion might be introduced, thereby hampering the development of priestly vocations.”


In reviewing both the initial statement released in 1994, as well as the 2001 follow up, Fr. John Zuhlsdorf provided a succinct summary of the parameters governing the practice of allowing girls to serve at the altar:


*Diocesan Bishops can choose to authorize, or not, service at the altar by females.

*Just because another diocese has service by women, that doesn’t mean any other diocese has to have it.

*Priests cannot be forced to have females serve their Masses.

*Pastors cannot be forced by bishops to have female servers.

*There is an obligation to support the service at the altar by boys.

*There is a connection between service at the altar by boys and vocations to the priesthood.

*No lay person has the right to serve at the altar for Mass or any other liturgical worship.


This isn’t mere speculation. We have the data. As I have previously written:


“…the 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released the findings from the 2014 Survey of Ordinands to the Priesthood. Prepared by Georgetown’s Center for Applied Research in the Apostolate (CARA) for the USCCB, the survey was completed by 365 ordinands, an impressive 77 percent response rate…


“Of the 365 men surveyed this year, a whopping 80 percent had been altar boys during their formative years. In comparison, only 52 percent of ordinands had been lectors, less than a third had been youth ministers and only 15 percent had ever attended a World Youth Day or a Steubenville Youth Conference.”


This is consistent with prior surveys conducted by CARA. The percentage of ordinands who had been altar boys for some portion of their formative years were 70%, 71%, 75%, and 67% respectively for the years 2010, 2011, 2012 and 2013.


Based on the repeated statements and clarifications released by the 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and the Discipline of the Sacraments over the years, and the statistical findings reported to the USCCB itself by CARA, one can’t help but ask, “What is there to left to debate?”


The end of the video clip above gives us the answer. Bishop Coyne states that to discontinue the practice of female servers now would be telling girls that they are “second class citizens” instead of “welcoming them to the table.”


This of course is also the sort of language employed by those who try to impose a secular and misguided understanding of equality and participation into the liturgy. In our contemporary culture many fail to understand that serving in different ways does not reflect being any more or less important. To acknowledge that males and females are different — and have different roles — is healthy. People have been conditioned to think that if anything is “off limits,” someone is being denied their “rights”. The Church recognizes the dignity of the individual precisely because it extols the beauty of the differences between the sexes.


Finally, the claim that excluding girls from altar service negatively impacts the Church — or their role in it — doesn’t add up. An increasing number of parishes have already eliminated the use of female servers. The Extraordinary Form of the Mass, following the rubrics of the liturgical books in effect in 1962, does not permit for altar girls. More and more traditionally-minded parishes have sought consistency in the two forms by not permitting girls to serve at the Ordinary Form either. In most cases, parishes that embrace liturgical orthodoxy are experiencing increased attendance and participation. Their pews are packed with large families. If the sons of those families are serving at the altar, it’s not with envious looks from their mothers or sisters. If anything, there’s a sense of appropriate pride, and perhaps even the hope that one day, the family may see one of its own members join the priesthood.


In the end, this issue requires careful consideration and honest dialogue. To tackle this topic means we must look at the guidelines the Church has already issued, the origin and effects of the practice, and the data we have showing a connection between altar service and priesthood – which is, and will always be reserved for men. It is interesting that those who so vigorously defend a twenty-year-old practice — a recent innovation for a two-thousand-year-old institution — appear disinterested in actually studying its impact upon discernment and vocations. Instead, we are presented with arguments about “rights” and “feelings.” There is also anecdotal information that points to a loss of male altar servers when females are allowed. If the effect that the practice is having is detrimental to vocational discernment and ultimately the future of the priesthood, it can and should be reconsidered.


We can’t afford to ignore the signs. The next generation of Catholics — who will be deeply affected by the continuing decline of vocations to the priesthood — deserve better than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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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 코르딜레오네 대주교: 이제 더 이상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주신 요청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에게 경고한다"

“내가 과거에 너희에게 경고했지만, 너희가 귀담아듣지 않았듯이, 만일 너희가 더 기도하고, 더욱 보속과 희생을 드리지 않는다면, 공산주의는 전세계를 뒤덮고 국가들을 정복하고, 너희들의 믿음을 빼앗으며, 나의 성자의 교회의 고위 성직자의 자리에까지 들어갈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너희가 부인할 수 있느냐? 눈을 뜨고 보아라! 너무 늦기전에 어두움 속에서 빠져나와라. 왜냐하면 어두움의 교회는 죽음의 띠를 두르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어두움의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7. 3. 18

"나의 딸아, 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경고를 보냈건만, 너희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구나.

"나는 네가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파티마를 방문했던 일을 알리거나 그 기억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4. 4. 13






살바토레 코르딜레오네 대주교: 이제 더 이상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주신 요청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NCRegister.com, 2017. 10. 9 기사:


다음 강론, “파티마: 세계의 구원과 평화를 위한 영적 무장의 부름”은 10월 7일, 살바토레 코르딜레오네 대주교가 샌프란시스코 대교구를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봉헌하며 전달한 것입니다.


서론

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또한 파티마 발현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당연히 이 초자연적 현상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발현의 극적인 요소들—전쟁과 재난에 대한 예언, 춤추는 태양, 지옥의 환상—에만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부분에 쉽게 빠져, 어쩌면 그로 인해 이 발현의 핵심인 메시지 자체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옥의 환영과 지나 온 100년

지옥의 환영은 파티마 발현 이야기에서 잘 알려진 중요한 순간입니다. 어린 세 명의 양치기 아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보았으며, 그 광경은 너무도 끔찍하고 무서워서 모두 비명을 질렀습니다. 바로 이 환영이 나타난 직후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널리 퍼뜨릴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환상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어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지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계시된 이후 지난 100년 동안 일어난 일들과 우리가 그것을 따르지 못한 현실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나온 한 세기가 다름 아닌 지옥의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지난 한 세기 동안 여러 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의사소통, 상업, 여행이 더욱 편리하고 신속해졌다는 점입니다. 또한 신체적·정신적 질병의 치료와 완화에 대한 발전, 그리고 시민권의 향상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분야에서 끔찍한 퇴보가 있었으며, 심지어 발전이 이루어진 바로 그 영역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 한 세기를 돌아본다면, 그것이 여러 면에서 살아 있는 지옥의 반영이었으며, 많은 측면에서 하느님을 조롱해 온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모든 예를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지만, 즉시 떠오르는 것만 해도 온 세계를 폭력과 유혈 속에 휩싸이게 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와 대량 학살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한 번의 학살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대량 학살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것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가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100년 동안 세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권들이 탄생하였으며, 그것은 지구 곳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매 시대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중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그리스도인과 다른 종교적 소수 집단이 탄압받고 말살당하고 있으며, 이들이 국제 사회에 보호와 정의를 호소해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 시간과 공간을 그렇게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불과 며칠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발생한 참혹한 사건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깊은 슬픔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번 사건이 수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계속되어 온 무의미한 폭력의 연속 속에서 가장 최근이자 가장 참혹한 대량 총격 사건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무고한 생명에 대한 공격이 있습니다. 우리 땅은 이미 태아의 생명을 대상으로 한 치명적인 유행병과도 같은 학살로 인해 무고한 어린 생명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삶의 여정의 반대편에서 버려지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도시인 샌프란치스코의 거리에서도 우리는 중독과 정신 질환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또한 저속함과 신성 모독이 찬양받고 심지어 숭배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아름다운 계획—우리의 몸 자체가 서로 그리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그 계획—이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리에서 하느님은 철저히 조롱받고 있으며, 우리 사회는 이를 승인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도, 우리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요? 한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파티마 발현 이후의 지난 100년은 하느님을 조롱해 왔지만, 하느님은 조롱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을 즐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등을 돌릴 때 그 결과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자신의 파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일이 오늘날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의 폭력, 파괴, 도덕적 타락을 저지르는 수단이 과거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대규모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더욱더 우리가 파티마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옹호자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께 의지합니다. 이 모든 고통과 황폐함의 근원에는 영적인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체적·정신적 질병과는 달리 우리 시대에 더욱 심화되었으며, 대부분 치료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자율적인 자아’를 세우며,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 자기만의 현실을 창조하는 병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인 진리이자 완전한 사랑의 상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의지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가는 길을 가리켜 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성체 안에, 성사 안에, 말씀 안에 계시며, 교회 안에 현존하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를 들어 그분께 데려다줄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그곳에 갈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아들을 어머니로 삼으시는 특별한 역할을 하셨듯이, 당신 아들 안에서 우리를 생명으로 어머니로 삼으시는 특별한 역할도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들의 삶과 신자들의 삶 안에서 행하시는 이 이중적인 모성 사역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Mother of the Redeemer. 구세주의 어머니」(24항)에서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설명하셨습니다:


… 말씀의 성육신 순간과 교회의 탄생 순간 사이에는 독특한 연결성이 있습니다. 이 두 순간을 이어주는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계셨던 마리아…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서 어머니로서 함께하셨던 마리아께서는 아들의 뜻과 성신의 능력에 의해 교회의 신비 속에서도 현존하시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모님은 어머니로서의 존재를 계속 이어가십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인이여, 보라, 네 아들이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의 현존 속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를 파티마의 성모님의 이미지에서 은밀하게 표현된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옷자락 아래에는 별이 있습니다. 이 별은 구약성경의 에스더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라는 이름 자체가 “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에게 간청하여 자기 백성의 생명을 구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일을 감행했습니다. 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이했지만, 속임수에 넘어가 유대인 학살을 명하는 칙령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에스더는 자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왕에게 간청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만천하에 밝혀야만 했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간청함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 복음의 별이신 성모님께서도 우리의 왕께 끊임없이 간청하십니다. 이는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가난한 신랑 신부를 위해 간청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께 나아갈 경우 성모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실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비를 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엄격한 정의로 우리를 대하실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비를 간구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가 그분의 아드님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 신랑 신부를 도우셨던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의 요청에 귀 기울이고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다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파티마의 메시지를 외면했습니다. 혹은, 어쩌면 메시지 자체를 외면했다기보다는, 그 경고와 그로 인해 펼쳐진 역사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외면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주의를 기울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대로 하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께서는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을 통해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그 요청을 따를 때입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를 바꿀 힘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인다면 말입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는 지난 세기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 메시지를 따르고 요청에 응답할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우리 대교구의 역사 속에서 감동적인 행사나 즐거운 기억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해야 할 일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장을 위한 전투의 부름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지금 치열한 영적 전투의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으며, 오직 영적인 무장을 갖추는 것만이 오늘날 세상에 만연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근원이 되는 영적 질병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자극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파티마에서 우리 성모님께서 주신 요청에 응답할 때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부탁하셨을까요? 놀랄 일도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언제, 어디서 나타나시든 메시지의 핵심은 기도, 회개, 그리고 흠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파티마에서 그분은 매우 분명하게 두 가지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파티마의 메시지는 단순히 현세적인 질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원한 질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질서 모두에서 그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도 큽니다—바로 세계 평화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모든 신자들에게 우리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이 세 가지 평화와 구원의 처방을 마음 깊이 새길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행동 프로그램

우선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모든 신자분들께, 아직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셨다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가족분들께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샌프란시스코 대교구를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는 미사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거행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로사리오 기도의 힘을 다시금 깊이 상기시키는 의미 깊은 순간입니다— 평화를 이루고, 심지어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역사 또한 바꿀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참회: 특히 우리는 참회라는 영적인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회개는 우리의 영적 무기고에서 강력한 무기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안타깝게도 이를 외면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회개 실천에 대한 규율을 개혁한 것은 그 중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을 각 개인 신자의 삶에 적용하는 더욱 성숙한 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금요일은 사도 시대부터 교회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여전히 참회의 날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제 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적인 관습 대신 다른 형태의 금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참회가 더 큰 희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금요일을 참회의 날로 봉헌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날을 기리는 의미 깊은 실천입니다. 이날 구체적인 형태의 육체적 단식을 선택하여 실천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고기나 특정 음식, 평소 즐기는 음료를 삼가거나, 아예 한 끼를 단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참회 행위 또한 우리가 고해성사를 더욱 진지하게, 그리고 자주 받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고해성사 거행의 쇄신 없이는 영적 쇄신, 특히 성체 신심의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모든 신자들에게 더욱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고 더 자주 이 성사를 받도록 요청합니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흠숭(경배): 우리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며,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 아들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심 행위는, 그리고 우리의 모든 보속 실천 역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모님께서 요청하시는 흠숭(경배)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 사회의 거짓 신들을 숭배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게 하고, 오직 한 분이신 참되신 하느님께 온 마음을 다해 경배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루치아는 파티마에서 계시를 받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흠숭(경배)은 완전한 찬미의 찬가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으며, 그 사랑으로 감동하시어 우리에게 존재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헌은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모든 신자 여러분께 매주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내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평일에 시간이 어렵다면, 주일 미사 전이나 후에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매주 최소한 얼마간이라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사 안에 계신 우리 주님—그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자비를 간구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 성모님께서는 또한 ‘첫 토요일 신심’을 실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파티마의 어린이들이 지옥의 환시를 본 직후 성모님께서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에 대한 신심을 요청하셨을 때와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신심은 다섯 달 동안 매달 첫 토요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하며, 죄에 대한 보속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고해성사를 받기 전이나 후에 15분 동안 묵주기도 5단을 바치는 것이 포함됩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 성모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돕고자 하시는 깊은 염려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신심의 핵심은 죄에 대한 보속을 실천하는 것, 특히 모독죄에 대한 보속을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대교구의 모든 신자들에게 ‘첫 토요일 신심’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실천으로 삼아,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이를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오늘 미사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빛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 아시리아의 압제 도구를 파괴하시고, 그들을 해방시킬 왕을 보내주셨습니다. 로사리오 기도, 육체적 단식,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을 흠숭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적 무기이며, 지난 100년간 세계 역사를 뒤덮은 영적 억압을 파괴하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곧 세계 평화와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아이들이 지옥을 환시한 후에 성모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매우 중요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요청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결국, 나의 티 없는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성모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성모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승리를 앞당깁시다. 그 승리는 곧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아들의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신 성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티없으신 성심은 우리에게 그 승리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진리와 자비의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문 너머에는 영광스럽고 광활하며 빛으로 가득 찬 천국이 펼쳐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심은 천국의 문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미사, 행렬, 봉헌 행위를 마친 후 성체 조배와 성찬 강복으로 우리의 기도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일으켜 세워 당신의 아들께 인도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모성적 성심을 통해 우리가 걷고 있는 어둠에서 성자의 빛 속으로 데려가길 원하시며, 또한 성자께서도 우리가 성모님께 그렇게 인도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는 성모님의 요청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즉, 성모님의 요청을 들어주어 우리가 항상 그분의 아들, 곧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오늘의 묵상을 마무리하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성체성사에 관한 회칙의 결론에서 인용하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읍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듯, “기쁨과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이 열망하는 그 목표를 희망 속에서 묵상하며” 나아갑시다:


그러니 오소서, 선한 목자시며 신성한 빵이신 주님, 여전히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의 표징을 보여 주소서. 오, 우리를 먹이시고, 언제나 당신의 것으로 지켜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한 들판에서 당신의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오,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하며, 가장 선하신 주님, 우리의 현재의 양식이시며, 미래의 안식이신 주님, 오셔서 우리 각자를 당신이 선택하신 손님으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은총을 주시며, 당신과 함께 거하는 성인들과 복된 벗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나의 자녀들아, 이제 어떤 나라라도 공산주의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성심이 찢어질 듯 아프구나. 하느님의 원수들이 너희에게 와서 달콤한 혀로 너희를 구슬려 사악한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적들과 타협하지 말 것을 경고하러 그동안 지상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발현하였다. 하지만 인간들은 은총이 모자라 이런 악마들의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저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8. 5. 13


"너희는 나의 어머니의 경고를 외면해 왔다. 어머니께서는 곰이 인간을 침략할 것임을 거듭 경고해왔다. 어머니께서는 공산주의의 해악이 인간에게 미칠 영향을 경고했지만, 너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늘의 경고를 듣고 실천하였느냐? 나의 자녀들아, 이제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겠느냐?”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6. 6. 12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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