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유산
"나의 자녀여, 나는 세상에 닥칠 악을 미리 알아차렸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남긴 지식을 찾아보세요. 나 또한 성신의 깨달음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남긴 진리의 유산을 잘 찾아 읽어보세요. 근대주의는 여러분의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입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성 비오 10세, 1974. 9. 7
이단으로 이끌다
"성자의 집의 선한 목자들은 언제나 현대화와 현대주의의 위험을 경고해 왔다. 근대주의는 언제나 이단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주의는 신앙을 어둡게 하고 많은 이들의 마음에서 신앙을 빼앗아갈 것이다. 근대주의는 무신론으로 이끌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잠에서 깨어나 시대의 징조를 알아보아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6. 11. 1
제3차 바티칸 공의회
"나의 딸아, 어떻게 될 것인지 지켜보거라. 저들은 또 다른 공의회를 열 것이다. 오, 하지만 사탄은 지금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있구나. 오, 저주받을 것이다. 사악한 자들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다! 저들에게 내려질 것이 무엇이겠느냐?”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4. 2. 1
훨씬 나쁜 것이 온다
"그리고 만약 너희가 이미 교회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수년 전 어머니께서 주신 기도, 보속, 희생의 규칙을 따르지 않아서 찾아올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86. 6. 18
오직 사탄만이 변화를 찾는다
“천국에서는 시간도 바뀜도 없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불안하게 하고, 타락시키고, 삶을 떨어뜨리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오직 사탄뿐이다. 사탄은 영혼의 어둠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달려갈 것이다. 사탄은 인류를 구렁텅이에 떨어뜨려 더는 사악한 죄악을 인지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타락시킬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5. 3. 22
[3-3] 시노드 정신에 관한 시노드는 교황 성 비오 10세가 경고했던 모더니즘의 이단을 어떻게 전형적으로 보여주는가…
LifeSiteNews.com, 2023. 12. 22 기사:
매튜 맥쿠스커 Matthew McCusker 작성
시노드 정신에 관한 시노드의 최종 목표는 “경청하고 동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정체성과 성, 임종, 복잡한 부부 관계, 인공지능 관련 윤리적 문제”와 같은 “새로운 질문”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채택할 것입니다. [1]
시노드 당국에 따르면, 현재 가톨릭 사상은 "우리가 발전시켜 온 인류학적 범주의 한계" 때문에 이러한 분야에서 "경험이나 과학적 지식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2]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들은 미래의 “시노드 교회”에 의해 해결될 것이며, 이 시노드 교회는 “교회적 분별력과 열린 질문들”에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들을 섬기는 신학적, 문화적 연구”를 가져올 것입니다.[3]
이번 분석에서 우리는 ‘시노달리티’가 사실상 근대주의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근대주의는 ‘모든 이단의 종합’으로서, 교황 성 비오 10세께서 1907년 9월 8일에 반포하신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 (근대주의자들의 교리에 관하여)에서 지적되고 단죄된 바 있습니다.[4]
이 글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성 비오 10세께서 제시한 근대주의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시노드 정신에 관한 시노드가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근대주의란 무엇인가?
교황 성 비오 10세는 회칙 「Pascendi Domenici Gregis」에서 모더니즘 이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폭로합니다.
근대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불가지론입니다. 근대주의자는 인간 지성이 감각적 현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명제에도 확실히 동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성 비오 10세께서 가르치셨듯이:
근대주의자들은 종교 철학의 기초를 흔히 불가지론이라고 불리는 교리에 둡니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현상의 영역, 즉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들과 그 지각 방식에만 국한되며,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권리도 능력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조차 신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신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5]
불가지론의 결과로, 근대주의자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초자연적 계시에 동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가톨릭 교리와 실천이 단지 인간 내적 경험의 상징적 표현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성 비오 10세께서 가르치셨듯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종교는 다른 모든 사실과 마찬가지로 어떤 설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외부 계시를 절대적으로 부정한다면, 인간 자신 밖에서 그 설명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명은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하며, 종교는 삶의 한 형태이므로, 그 설명은 분명 인간의 삶 속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6]
근대주의는 종교가 인간 마음의 내적 움직임, 즉 "종교적 감정"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참된 신이 내린 외적 계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더욱이, 종교는 어떤 필요성이나 충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특히 삶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기원은 마음의 움직임, 즉 감정이라고 불리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종교의 대상이므로, 모든 종교의 기초이자 근간이 되는 믿음은 신에 대한 필요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7]
그러므로 근대주의자는 신의 계시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고 가톨릭 교회를 통해 무오류적으로 전승된 영구적인 교리 체계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이 인간 내면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봅니다:
따라서 근대주의는 이 ‘감정’ 속에서 단순히 신앙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신앙과 함께, 그리고 신앙 안에서 계시를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계시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의식 속에서 감지되는 그 종교적 감정이 곧 계시, 아니면 적어도 계시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8]
근대주의자에게 있어 모든 종교 교리와 신조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이러한 개인적인 "계시"는 교회의 가르침 권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식과 계시를 동의어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종교적 의식을 보편적인 규칙으로 제시하고, 계시와 동등한 위치에 두며, 교회의 최고 권위, 즉 가르침을 제공하는 역할이든, 성례전이나 규율에 관한 입법자 역할이든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법으로 규정합니다. [9]
근대주의자에게 있어서 모든 가톨릭 교리와 실천은 단순히 인간 내적 경험의 산물로 여겨지기에, 이러한 개인적 “계시”는 교회의 가르침 권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주의자에게 종교적감정은 모든 종교의 근원이며, 모든 종교에 존재했거나 존재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근본 원리입니다. 이 감정은 처음에는 단지 미약하고 거의 형태가 없었으나, 그것이 비롯된 신비로운 원리의 영향 아래, 인간 삶의 진전과 함께 점차 성숙해 갔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적 감정은 삶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기원이며, 단지 이러한 종교적 감정의 발전일 뿐입니다. 가톨릭교 또한 예외가 아니며,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믿습니다. [10]
요약:
-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직접 계시하신 교리를 가르칩니다.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매 세대에 걸쳐 이 교리를 무오류적으로 제시합니다.
- 근대주의자들은 이를 뒤집습니다. 그들의 체계에서는 교리가 인간의 내면적 경험에서 시작하여, 그 경험이 말과 상징으로 표현되고, 나중에 교회의 승인을 받아 신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관한 어떤 진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 비오 10세는 모더니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먼저 인간의 지성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개념을 단순하고 평범한 진술로 표현합니다. 그런 다음, 숙고하고 더 깊이 생각하거나, 흔히 말하는 것처럼 생각을 정교화하여, 첫 번째 진술에서 파생되었지만 더 완벽하고 명확한 이차 명제로 그 개념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이차 명제들이 최종적으로 교회의 최고 교도권의 승인을 받으면 교리가 됩니다. [11]
가톨릭 신자는 교회의 교리가 실제로 진리이며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직접 계시하셨고 교회가 무오류적으로 가르쳐 온 것이라고 믿는 반면, 근대주의자는 교리가 단지 상징적인 가치만을 지닌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가 어떤 면에서는 진리를 나타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대주의자에게 있어서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에 의해 결정됩니다: 만약 신자가 이러한 주장을 어떤 토대 위에 세우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 속에서이다.” [12]
근대주의의 전형으로서의 시노드 정신의 시노드
우리는 근대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경험을 종교 교리와 그 해석의 기초로 삼는 데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노드 정신의 시노드" 문서들이 이러한 이단적 경향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3년 ‘시노드 정신의 시노드’ 종합 보고서는 “교회적 분별과 미해결 과제”라는 제목의 섹션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들을 섬기는 신학적, 문화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확인했습니다. [13]
다시 말해, 신학적 "미해결 문제"는 개인의 "일상 경험"을 성찰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하며, 교회는 그러한 경험에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비오 10세는 이러한 근대주의적 “성찰(reflecting)”을 “숙고(pondering)”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
개개인의 경험, 특히 시노드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경험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함께 나눈 경험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며, 그 풍요로움과 깊이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필요한 설명이 더해진다면, 시노드의 정신이 교회의 미래를 대표한다는 데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5]
시노드 당국에게 있어 거룩한 전통은 더 이상 불변의 신앙의 보고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갱신"될 수 있는 단순한 "유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곳에서 얻은 영적 경험을 공동체 과정에 적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야말로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소이자 형태임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노드적 관점은 풍부한 영적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그 형태를 새롭게 합니다. 즉, 참여에 열려 있는 기도, 함께 살아가는 분별, 그리고 나눔에서 비롯되어 봉사로 발산되는 선교적 에너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16]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의 경험과 인간 관계가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내는” 식별이 “전통”이 어떻게 새롭게 되는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전통”, 혹은 그들이 또한 표현하는 바와 같이 “다른 곳에서 얻은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규범적인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대화’
시노드의 심의는 "영성 안의 보존"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교회의 교도권이 제시한 교리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근대주의적 접근 방식과 다름없습니다:
영성 안의 대화는 비록 한계가 있지만, 성신께서 교회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분별하기 위해 진정으로 경청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이 실천은 기쁨과 경외감, 감사를 불러일으키고,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교회를 변화시키는 갱신의 길로 경험되어 왔습니다. "대화"라는 단어는 단순한 대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엮어 공유된 생명력 넘치는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회심이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인류학적 현실로, 공동체에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결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연대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적 경험을 완성으로 이끕니다. ‘영성 안의 대화’란 신앙의 빛 안에서 나눔의 경험을 살아가며, 성신의 분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정한 복음적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17]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성 안의 대화"란 "생각과 감정이 얽히는 것"이며, "인류학적 현실", 즉 인간적인 현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도나 명상처럼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모여" "공동체에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는" 인간들 간의 대화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경험일 뿐,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소통이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총은 단지 "이러한 인간적 경험을 완성하는 것"으로 축소됩니다. "영성 안의 대화"는 인간적인 대화일 뿐, 초월적인 하느님과의 소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근대주의적 불가지론은 이러한 하느님을 알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 경고하셨듯이, 근대주의자에게 "하느님은 인간 안에 내재합니다." [18]
시노드 당국은 “영성 안의 대화”란 “신앙의 빛 안에서 나눔의 경험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시노드 당국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가톨릭 교회에 계시하신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성신의 자유와 새로움에 대한 언급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영원히’ 오셨다는 사실(히브리서 10:10)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식별 기준을 더욱 심화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예언적으로 해석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9]
“아버지의 뜻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자유와 새로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오셨다는 사실”과 “적절하게 조화되도록” 하는 “교회적 분별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통, 교도권, 그리고 “시대의 징표”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합니다. 이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노드 교회”에서는 더 이상 교도권이 해석한 성경과 전통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시대의 징조에 대한 예언적 해석”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다음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 경험의 지적 차원과 정서적 차원을 단순히 병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합할 수 있는 인류학적, 영적 비전을 함양하고, 이성과 감정 사이의 환원주의와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20]
이 용어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성 비오 10세는 근대주의자들이 신자들을 속이기 위해 고의적으로 자신들의 이단 사상을 모호한 언어로 포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근대주의자들(일반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그렇게 불린다)은 매우 교묘한 책략을 사용합니다. 즉, 그들의 교리를 하나의 전체로 질서 있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서로 흩어지고 분리된 상태로 내놓음으로써 의심과 불확실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은 확고하고 굳건합니다. [21]
게다가 비오 10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만큼 온갖 해로운 술수를 부리는 데 능숙하고 교활한 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합리주의자와 가톨릭 신자의 역할을 교묘하게 섞어 순진한 사람들을 쉽게 잘못된 길로 이끌어냅니다. 게다가 대담함이 그들의 주된 특징이므로, 어떤 결론이든 주저하지 않고 끈질기고 확신에 찬 태도로 밀어붙입니다. [22]
이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위에서 인용한 종합 보고서의 구절들을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가 폭로한 모더니즘 방법론과 비교해 보십시오:
근대주의자에게 있어서 교리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적 공식과 종교적 감정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공식들이 신자에게 자기 신앙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식들은 신자와 그의 믿음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합니다. 믿음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은 믿음의 대상을 불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대개 상징이라고 불립니다. 신자와의 관계에서 그것들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23]
그는 게속 말합니다:
그러므로 근대주의자가 그것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상징으로서 진리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인간과 관련된 종교적 감정에 맞춰져야 하고, 도구로서 진리의 전달 수단이기 때문에 종교적 감정과 관련된 인간에게 맞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감정의 대상은 절대자를 포괄하기 때문에 무한히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한 양상이, 때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 또한 여러 단계를 거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리라고 부르는 공식들 역시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내적 진화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는 모든 종교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엄청난 궤변의 집합입니다. ‘교리는 단지 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해야 한다.’ 이는 근대주의자들에 의해 강하게 주장되며, 그들의 원리로부터 명백히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4]
다시 말해, 근대주의자는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단지 "종교적 감정"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종교적 공식"으로만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시노드 당국이 “신앙 경험의 지적 차원과 정서적 차원을 단순히 병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합할 수 있는” “인류학적이고 영적인 비전”을 장려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적 차원”은 “종교적 공식”이고, “감정적 차원”은 “종교적 정서”입니다.
근대주의자들은 ‘종교적 공식’과 ‘종교적 감정’ 사이의 이러한 대화로부터 새로운 ‘종합(synthesis)’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는 시노드 당국이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정체성과 성, 삶의 마지막, 복잡한 부부 관계,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 등과 같은 특정 사안들은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는 이러한 문제들이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개발한 인류학적 범주들이 경험이나 과학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더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성찰에는 필요한 시간을 들이고, 개인과 교회의 몸을 상하게 하는 단순한 판단에 굴복하지 않고 최선의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이미 많은 문제들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가르침은 분명히 사목적 실천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명확한 설명이 요구되는 경우에도, 기도와 마음의 회심 속에서 받아들여진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25]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의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기를 거부하지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성, 도덕, 그리고 임종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확정된 것이 아니며("새로운 질문들"), 충분하지 않고("우리가 발전시켜 온 인류학적 범주로는 복잡성을 파악할 수 없다"), 구속력이 없으며("방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분명히 여전히 사목적 실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종합 보고서의 다른 단락에서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인류학적 영향, 비폭력과 정당방위, 사역 관련 문제, 성과 '육체성' 관련 문제 등 교회 내 논란이 되는 사안들을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26]
보고서의 다음 단락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과 가르침”에 “빛을 비추어” “진정한 교회적 분별력”을 거쳐야 하며, “적절한 정보를 얻고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근대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 즉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27] 시노드 교회가 “공허한 공식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즉, 가톨릭 교리) 반드시 “대화”를 진행해야 하며, 그 대화 속에서 “철학적·신학적 성찰”(사유)은 단지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인문·사회 과학”과 나란히 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교리와 인간 경험 사이의 대화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28]
진리는 교회의 교도권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시노드 경험에 대한 이해”가 자리 잡는 “공동의 식별”을 통해 도출될 것입니다. [29]
위에서 제시된 본문들은 종합 보고서가 대주의적 접근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부 발췌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경험”이라는 단어가 보고서에서 72회 등장하는 반면, “교리”는 단 6회, “교도권”은 단 3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보고서에 대한 더 광범위한 분석은 여기 제시된 발췌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 즉 종합 보고서가 계시에 대한 근대주의적 이해를 공개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을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사실, 시노달리티의 과정 자체가 현대인의 경험에 따라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참된 가톨릭 신앙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근대주의적 종교의 실천입니다. 가톨릭 신앙의 특정 언어적 표현들을 유지하지만, 그 본질을 왜곡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톨릭과 모더니즘은 공통된 어휘를 사용하지만, "신앙", "계시", "교리"와 같은 용어에 부여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어휘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다릅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과 역대 가톨릭 교회가 가르쳐 온 참된 가톨릭 신앙과 프란치스코 교황 및 그의 공범자들이 추구하는 근대주의적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판단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적들 가운데 그러한 사람들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영혼의 내적 상태는 오직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에 제쳐두더라도, 그들의 신념, 말투, 행실을 알게 된다면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들을 교회의 모든 적들 가운데 가장 해로운 자들로 간주하는 데에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를 파멸시키려는 계획을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험은 교회의 바로 그 혈관과 심장부에까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이 교회에 대해 더 잘 알수록 교회의 피해는 더욱 확실해집니다. 더욱이 그들은 가지와 새싹이 아니라 바로 뿌리, 즉 신앙과 그 가장 깊은 불꽃을 향해 도끼를 휘두릅니다.
그들이 이 불멸의 뿌리를 공격한 뒤에는, 온 나무에 독을 퍼뜨려서 가톨릭 진리 가운데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게 만들며, 오히려 모든 것을 부패시키려 애씁니다. [30]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나의 자매들이여, 어둠에서 빠져나오세요. 여러분은 잘못된 인도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지 마세요. 천국에서는 유행이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쫓는 자들에게는 큰 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수도원에 보낸 자들 때문에 낙담하여 수도원을 떠나면 안 됩니다. 순결함과 경건함의 본보기로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관습을 다시 돌려놓아야 합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성녀 소화 데레사, 1972. 11. 20
“우리는 변화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나의 말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에도 나를 슬프게 하였고, 지금도 나를 슬프프게 하는구나. 분명히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그리고 지상의 나의 교회에 있는 나의 목자들아, 절대로 나의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 나의 자녀들아, 천국과 지옥, 연옥, 그 중에 특히나 ‘지옥’이라는 단어는 너희 기도 중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
“나의 딸아, 통회의 기도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 나의 천주여
우리 천주께 득죄하였음을
진심으로 통회하나이다.
내 모든 죄과를 고백하오니 이는 천국을 잃음과
지옥의 고통을 두려워 함이며,
그 무엇보다도 지선하신 천주를
만유위에 사랑함을 인하나이다.
이제 일심으로 내 죄과를 통회하고
마음을 정하여 보속을 행함과
생활의 개선함을 굳게 결심하오니
바라건데 천주는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렇다, 나의 딸아, 우리는 변화나 교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을 바꾸려 애쓰는 자는 너희 하느님의 원수들뿐이다. 너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변치 않을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7. 2. 10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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