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만의 죄
"태만의 죄는 평신도든 고위성직자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다시 말한다. 행동의 죄가 아니라 태만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그들 중에는 고위성직자도 있을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8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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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호프만의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1886년 |
태만의 죄
수십 년 전, 풀턴 쉰 대주교가 한탄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 교회 문화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무디게 하는 수많은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괜찮아, 너도 괜찮아”라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만연하여,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자비로운 교회적 꾸짖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십계명은 이제 이렇게 대체되었습니다: “심판하지 말라.”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봅시다. 교회는 죄란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생각, 말, 행동, 또는 하지 않는 행위를 포함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심판 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지 않은 일 때문에 정죄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오 25:45)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한 일뿐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도덕적인 상황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를 아름답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죄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들어 올린다고 복자 엘리자베트 레쇠르가 말했듯이, 신적 사랑을 배반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 조건을 짓누르고 교회를 빈곤하게 만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1992년 4월 15일)
그리고 고해성사에 관한 사도적 권고인 ‘Reconciliatio et Paenitentia’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이 성사의 사회적 성격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전체—지상에서 싸우는 교회, 고통받는 교회, 그리고 천상에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참회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모욕당하고 상처 입었기에 다시 품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1항, 강조 추가)
자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도덕 신학의 대가로서, 폴란드 루블린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셨습니다. 도덕 신학에 관한 그의 기념비적인 회칙 Veritatis Splendor (“진리의 광채”)는 이 주제만을 전적으로 다룬 최초의 교황 회칙입니다. 이 문헌에서 교황은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화적 경향을 경고하십니다. 곧 “자유와 법이 서로 대립하고 분리되며, 자유가 거의 숭배의 수준까지 높여지는” 경향은 “도덕적 양심에 대한 ‘창조적’ 이해를 낳게 되며, 이는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된다.” (Veritatis Splendor 54항)
진정한 자유와 방종에는 구별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하느님의 법에 합치되는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는 자유이며, 방종은 남용된 자유로서 악하거나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어떤 참조도 없이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많은 미국인들이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제임스 콜리어(James Collier)는 개인의 자유와 관련하여 적절한 격언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홀름스 대법관의 유명한 격언입니다. “당신이 팔을 휘두를 권리는 내 코 앞에서 끝난다.” 누구의 자유도 무제한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권리는 타인의 필요에 의해 제한됩니다. (미국에서의 이기심의 부상, p.261)
심판?
미국 사회는 권리는 강조하지만 의무(타인에 대한 우리의 책임)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자기숭배의 논리적인 결과입니다. 우리의 "즐거운 시간"을 침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수많은 슬로건 중 가장 흔한 것은 "당신은 심판하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개 어떤 비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교회의 교리 중 몇 가지 핵심을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죄에 가담한 공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협력하거나 그 죄에 가담할 때, 그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는 아홉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며, 곧 명령, 조언, 동의, 칭찬, 도발, 침묵, 도움, 저지른 악을 옹호함, 그리고 저지른 악을 처벌하지 않음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저지른 악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죄에 대해 참여하거나 방관함으로써 아홉 가지 방식으로 죄책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악에 직면하여 침묵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거나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죄는 하느님의 영광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책임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5:13-14). 물론, 어떠한 사랑의 권고에도 신중함과 자애가 항상 함께해야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위배되어
더 나아가 교회는 자비의 영적 실천 가운데 죄인을 권고하고 무지한 이를 가르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당신은 심판하고 있어요”라는 경멸적인 표현은 적절하고 사랑스러운 꾸지람의 자리가 전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입니다.” (야고보서 5:20)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치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레위기 19:17)
에수님: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주어라.” (루가 17:3)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2디모테오 4:2)
또한 성경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심판하지 말라"는 문맥에서 벗어나 인용되는 경우가 흔하며, 그 뒤를 잇는 구절들은 편리하게 생략되곤 합니다. 스콧 펙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희도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흔히 문맥에서 벗어나 인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심판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네 구절에서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지, 아예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마태오 7:5) 도덕적 판단에 내재된 악의 가능성을 인식하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것을 항상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기 전에 스스로를 정화하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거짓의 사람들: 인간 악을 치유할 희망』, 256쪽)
사실 "당신은 심판하고 있어요"라는 말은 영혼을 구원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동요를 피하는 데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진실의 수호
교황 비오 12세가 "20세기 교회의 박사"라고 칭한 철학자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는 그리스도교적 평화의 정신이 때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싸우도록 이끌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 우리 주님께서 말슴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 10:34)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상에 있는 거룩한 교회는 ecclesia militaris (“투쟁하는 교회”)라 불립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태도인 정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을 가지면서 동시에 악을 행하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과 보편적 평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온유한 성 요한 복음사가조차 신자들에게 이단자들에게 인사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2요한 10-11).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모, p.349-350)
객관적인 모든 잘못을 수동적으로 용인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폰 힐데브란트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악과 합치려는 척하는 태도, 즉 악의 세력이 펼쳐지는 것을 냉담하게 방관하는 태도는 진정한 사랑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 참된 조화를 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약함의 산물이며 악으로 더럽혀지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의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 350)
파비안 브루스케비츠 주교는 1999년 4월 10일 종교 생활 연구소에서 한 강연에서 신자들에게 “신중함이나 분별력과 같은 단어들이 단순히 행동하지 않거나, 무능력하거나, 나태하거나, 비겁하여 다른 사람들과 진실을 나누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변명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중함”이라는 잘못된 경고를 내세워 마땅한 질책을 피하곤 합니다. 브루스케비츠 주교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진리에 무관심하거나, 특히 교리적, 도덕적 진리를 일반 문화 속에서 누구나 반박하고 이견을 가질 수 있는 단순한 의견의 문제로 치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이웃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세례와 견진성사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닙니다. (파비안 브루스케비츠 주교, "대화와 관용의 한계", 1999년 4월 10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류를 없애고, 오류를 범한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는 또 다른 저서 『신의 도시에 있는 트로이 목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을 옹호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위한 투쟁이 불의한 것이라고 믿는 잘못된 평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이
…신이 계시한 진리를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오류를 없애는 것”을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일로 여깁니다. 그들은 신의 계시에 관한 오류는 자연적 진리에 관한 오류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오류가 가져오는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심지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도시에 있는 트로이 목마』, 202쪽)
로사리오 성모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진정한 행복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성직자가 너희에게 다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그러기에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말며 절대로 심판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너희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구나. 어떤 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때 너희가 그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에게 죄를 짓고 있으며 멈추지 않는다면 저들의 영혼이 연옥으로 가거나 지옥에 갈 수 있음을 알려 준다면 그것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랑이겠느냐?"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82. 6. 18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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