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제들과 성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들의 교만과 오만을 마음에서 버리라고 경고했었다. 그들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이 되어 버렸고,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지배를 받고 있구나. 이러한 새로운 방식은 영혼뿐 아니라 육신까지 완전 파멸로 이끌 뿐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8.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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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헨리 뉴먼 추기경 |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전례 변경에 대한 생각...
[존 헨리 뉴면 추기경]
19세기의 저명한 종교 작가이자 설교가인 존 헨리 뉴먼은 1825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받았으나, 신학적 확신에 따라 1845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공회의 서품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그는 1847년 가톨릭 사제로 다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교회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1879년 추기경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전례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저와 함께 생각해 보십시오. 전례의 단 한 글자라도 바꾸는 것에 저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여러분 각자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 구절이나 저 구절을 바꾸고 싶을지라도, 지금이 과연 단 한 글자라도 양보할 때입니까?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대부분의 여러분은 어떤 비본질적인 점들이 수정되기를 바라지만, 그 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으며, 무엇이 비본질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합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수정 사항이 모두 반영된다면, 미사의 변화는 매우 광범위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각자는 자신이 원했던 것을 조금 얻을 수 있겠지만, 원하지 않았던 변화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의 불완전한 부분들(각자의 관점에서)이 그 정도로 많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각자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부분을 재구성하는 것을 댓가로 치를만큼 중대한 것입니까?
결혼 예식문을 수정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제안된 변화에 분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찬의 축성 기도가 에드워드 왕의 첫 번째 책에 있던 그대로이기를 바라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이 가톨릭적 성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주하는 시편들을 생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생략을 오늘날의 피상적이고 혐오스러운 자유주의의 냄새가 난다며 애통해 할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사를 짧게 줄이기를 바라지만, 또 다른 이들은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미사를 드리고, 공적 미사에 더 자주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화가 주어지더라도 기뻐할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며, 오히려 고통받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모든 집단의 비판이 충족될 때까지 멈출 이유도, 정당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미사 전례는 잘 알려진 이야기 속에서 화가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그림을 수정하다가 결국 망쳐버린 경우와 같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비교적 비본질적인 변화들, 즉 기도서의 교리를 침해하지 않는 변화들만을 말하더라도, 그것들만으로도 책은 이미 달라진 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책은 분명 일관성이 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 변화들이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제기된 우연한 반대 의견들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비판하려는 성향은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분석하고 해체하기 시작하면, 판단은 혼란스러워지고 감정은 불안정해집니다. 다른 이들이 같은 정도로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신으로서는 이성을 남용하도록 마음을 허용한다면 미사의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 불편을 느끼고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를 들어, 먼저 저는 서두 문장에 대해 "복음적이지 않다.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았고, 주로 구약에서 가져온 것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권면문이 너무 장황하고 고풍스러운 문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반박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사죄는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 단지 선언일 뿐, 고해성사를 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비판이 계속될 것입니다.
*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우리가 끝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해악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뒤돌아본다면, 처음에 그러한 과정을 장려한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마음의 동요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더 나아가 우리 신도들에게도 말입니다. 신도들은 오랫동안 기도서를 자신들의 신앙과 헌신의 말씀으로 경건하게 여겨왔습니다. 마음이 약한 신도일수록 이러한 동요는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더 나아가 불쾌감과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이 제안한 신경의 수정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고성소로 내려가셨다"라는 구절을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보이지 않는 상태, 즉 죽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인 낙원에 계셨다는 사실이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호한 단어를 설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그것이 오해된다 해도 큰 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신경(사도신경 등)의 구성과 조화를 이루는 대체 표현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이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불안정한 자들은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제공한 하느님의 음성으로 여겨야 할 것들을 비판하는 습관을 배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 곧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혁신적 기질은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우리는 전례에 변화를 가져올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행사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시작하면 끝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해악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뒤돌아본다면, 처음에 그러한 과정을 장려한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서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 시작할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누가 그것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어떤 부분도 우리를 심각하게 불안하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성경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자유롭게 증언해 왔습니다.
‘우리는 제기된 항의를 달래야 한다, 어떤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항의하는지, 또 누가 달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아마 평신도들일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평신도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진지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바꾸기를 원하는 것들 때문에 양심이 본의 아니게 상처받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사교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 즉 개인적인 신앙심은 미미하고, 대화도 자유분방하며, 공언하는 원칙도 느슨한 사람들이 오히려 아닐까요? 그들은 가끔 교회에 나오기도 하지만, 곧 싫증을 내고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부유한 이웃과 식사를 하거나, 저명한 정치가나 귀족 지주와 만나 교회가 세상에 2세기나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며, 계몽된 교인들이 교회를 개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냉철한 이성이 반대하는 인정들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존경받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교회에 불만을 품는 것이 큰 아쉬움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결국 그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인도자와 교사라는 엄숙한 직분을 지니고 사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남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어떤 양보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소한 변화들이라도 괜찮을까요? 어떤 이들이 권고하고 어떤 이들이 수용하려는 문구상의 변화나 다른 변화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옥"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저주"를 "정죄"로 바꾸거나 주일 성경 봉독 순서를 바꾸는 것과 같은 사소한 변화에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전례 교리를 싫어합니다. 세상 물정에 밝은 그들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파문과 우리 전례의 다른 특이한 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우리가 굳이 애써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 "...우리는 오늘날의 통념, 즉 복음에서 사랑만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성품이며 거듭난 인간의 의무라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그분의 무한한 사랑뿐 아니라 무한한 거룩함과 공의도 드러납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친절과 자비뿐 아니라 그분을 향한 열심, 죄에 대한 미움, 죄인과의 분리라는 의무를 명하고 있습니다."
교리 변경에 반대한다는 말을 굳이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려 깊은 사람들은 이미 교리 변경을 충분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시작하면 결국 그 길로 가게 되지 않을지 진지하게 고려해 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을 바꾸는 것은 단지 변화를 위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뿐, 교정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자극하지만 정작 필요한 양식은 제공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흔히 ‘비본질적’이라 불리는 변화들이 그 자체 안에 어떤 원리의 씨앗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의 도입이 곧 그 원리의 시작이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저주하는 시편들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곧 오늘날의 관념을 묵인하게 되는 셈입니다. 즉, 사랑만이 복음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성품이며, 거듭난 인간의 의무라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된 복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뿐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거룩함과 정의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심, 죄에 대한 미움, 죄인들과의 분리라는 의무뿐 아니라, 친절과 자비의 의무도 함께 명령합니다.
위의 논평들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습니다. 즉, 과거에도 미사 전례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내가 지금 예측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따라서 다시 안전하게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반박을 제쳐두고라도,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풍조가 양보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정치적) 사안들을 양보했지만, 혁신의 흐름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안된 것들이 사소한 개선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변화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만일 교회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닥치더라도, 그때 침묵하고 무관심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지 않도록 지금 최선을 다해 행동하려고 합니다. 한때 필자 또한 다른 이들처럼 양당 사이에서 중도적인 길을 걷고 싶은 마음, 혹은 그런 유혹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건들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러한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열정과 박해, 교회와 세상, 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 둘 사이를 차지하려 드는 자는 기껏해야 수고를 헛되게 할 뿐 아니라, 결국 세상으로 다시 끌려갈 것입니다. 부디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마치 험난한 바다를 유람선으로 항해하듯 하지 마십시오. 이런 시기에는 한 마디 말도 헛되지 않습니다. 다른 때라면 순수한 의도였을지도 모르는 교회 개혁에 대한 추측조차 지금은 악의적인 의도를 띠게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깨닫기도 전에 그 결과는 이미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기도서에 대한 어떠한 변경 제안에도 반대하는 청원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주교들이 그러한 변경을 용인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계속해서 청원하십시오. 그들에게 청원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이러한 노력에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 역시 이러한 변경을 원하지 않지만, 성직자들의 지지 없이는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설령 동의한다 하더라도) 동의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여러분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들만큼이나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허용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빨리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현재 상황보다 다른 곳에서 선을 긋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금 양보의 한계를 분명히 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한계를 지키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만큼 지혜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굳건하며 마침내 올바른 길에 들어섰다고.
장례 예식이 본래 의도된 용도에 적합하지 않다는 불만이 많이 제기됩니다. 장례 예식은 고인을 기리는 기도문을 낭독할 때 고인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이러한 소망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경우 위험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구원에 필요한 영적 성취를 낮게 평가하게 만들고, 예식을 낭독해야 하는 성직자들에게는 부담을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인정하건대, 때때로 그 예식을 사용하는 것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어디에서 선을 긋든 말입니다. 당신이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례를 사용하는 것이 종종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또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 알고 있어서 감히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성직자는 오직 확실한 근거가 있을 때만 희망을 표현해야 합니까? 유족들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판단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더 크게 희망할 수 있고, 다른 이는 덜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각자가 자신의 판단에 꼭 맞는 정확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내용은 모두 장례 전례에서 제외해도 된다"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이것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신도들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받기를 원할까요? 차가운 "교훈"만 있을 뿐, 고인에게 애정 어린 작별 인사조차 없는 것을 말입니다. 차라리 (가상의)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장례 전례 자체를 아예 생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이들까지 포함될까 두려워서 선한 이들을 두고 친절하고 신앙적인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까?
* "저는 우리 교회가 공개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공언하는 '경건한 규율'의 회복을 위해 힘쓰는 모든 이들과 마음과 손을 맞잡겠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교회의 정신에서 벗어나 고의적인 죄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교회의 교리를 왜곡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극악무도한 자들, 즉 종교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위해 전례문을 낭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저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교회 또한 결코 그렇게 하도록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상습적인 술꾼, 욕설을 일삼는 자, 공공연한 죄인, 신성모독자 등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공언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감히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억을 기리는 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에 대한 절대적인 심판권을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통치 법칙을 지지하고 그 모형을 제시하며 실현을 돕기 위해 외적인 징표에 따라 판단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가 극악무도한 자들에게 성찬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교회의 다른 특권들도 박탈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교회는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해 전례문을 읽으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전례문을 시작하는 교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어지는 전례문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 파문당한 자, 또는 자해한 자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파문이란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례 의식의 일반적인 사용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전례 의식에 사용되는 단어를 바꾸기보다는 파문 관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악인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종교인들을 명백히 기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의무를 소홀히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전례는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대신 전례 방식을 바꿉니다. 이것은 원칙을 내세워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원칙을 고수하는 동안에는 모순된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모순이 초래하는 부조리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 고백을 실제 행동에 맞추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교회의 방식은 결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공개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공언하는 "경건한 규율"의 회복을 위해 힘쓰는 모든 이들과 마음과 손을 맞잡겠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교회의 정신에서 벗어나 고의적인 죄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교회의 교리를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들의 의도대로 장례 예식을 변경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명백히 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가 희망을 표현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도 가톨릭식 장례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톨릭식 장례를 받으려 합니까?
파문 제도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다른 길을 택하는 것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것입니다. 물론 아무도 파문 제도 복원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또한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헛된 논쟁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명백한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서 확률이나 전망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설령 어떤 사람이 고대 규율로 돌아가야 할 의무를 느끼는 유일한 교회 구성원이라 할지라도, 의무는 의무입니다. 명백한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서 결과를 따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큰 죄악 중 하나입니다. 이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 하지만 결과를 근거로 논증하지는 마십시오.
한편, 저는 그 의무를 입증하는 증거로 다음 문헌들을 제시합니다.
마태오 18:15-17; 로마서 16:17; 1 고린토 5:7-13; 2 데살로니카 3:6, 14, 15; 2 디모테오 3:5; 디도서 1:10-11; 2 요한1:10-11
통일된 원칙
사도 바울의 동료였던 성 클레멘트의 사도 계승에 대한 증언 (필립비서 4장 3절).
사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감독직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확한 예지(豫知)를 받았기에, 내가 앞서 언급한 사람들을 임명하였고, 질서 있는 계승을 마련하여 그들이 죽은 뒤에는 다른 인정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그 직분을 이어받도록 하였습니다. (클레멘스 1서 44장)
성 베드로의 친구였던 성 이냐시오가 주교단에 보낸 증언.
하느님께 합당한 여러분의 명망 있는 장로회는, 마치 하프의 줄들이 지휘자에게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주교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치와 조화로운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래되고 있습니다. (에페소서 4장)
주교를 인정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주교의 허락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양심이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마그누스 4장)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그분이 나의 증인이시니, 나는 이 교리를 필멸의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신께서 내게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필립비서 7장)
사도적 교부들의 이러한 강력한 구절들과 다른 증언들을 두고서, 우리가 지금의 실제적인 주교권 무시에 스스로를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법이 강제하는 범위까지만 순종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교를 지지하며, 그와 함께 모두가 하나 되어 움직이려 애쓰며 그를 우리의 결합의 끈이자 머리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일상적인 행실은, 일정한 정기적 형식과 관습을 제외하면, 각자가 자기 교구에서 독립적인 것처럼 되어 있지 않습니까?
"너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의 계획, 곧 과거에 너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전통 속의 과거를 조롱하는구나! 너희는 스스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 한다. 지옥의 문은 결코 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나의 교회를 자신의 잣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 지금 너희 인간들이 교회를 세우고 있는데, 그 교회의 목적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영혼을 준비시켜 천국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 된다! 인간은 귀중한 시간을 휴머니즘과 모더니즘을 조장하는데 허비하고 있구나! 너희는 인간의 육적인 본성을 먹이면서 그들의 영혼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6. 5. 15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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