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며 크나큰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사랑의 망토

"나의 자녀들아, 어머니로서 나의 성심은 너희때문에 찢어지는구나. 슬픔에 젖은 마음으로 내게 오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아,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 나 또한 상실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위해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이들아, 나에게 오너라. 내가 사랑과 위로의 망토를 너희 위에 덮어주리라.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의 짐을 가볍게 해주리라."

- 베이사이드 메세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9. 10. 6






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며 크나큰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EWTN.co.uk, 2025. 9. 15 기사:


마이클 오그누 Michael Ogunu 작성


중세 시대에 가톨릭 신학은 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그리스도 곁에는 언제나 슬픔의 성모가 있었으며, 주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에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함께 커졌습니다. 고대 성 십자가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을 교회는 성모 마리아 축일로 기념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칠고는 성경 속 사건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신심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7세의 공식 승인 이전에, 세르비테 수도회는 1668년에 칠고 신심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칠고 축일을 기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성모님의 일곱 고통에 대한 신심의 목적은,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겪으신 특별한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욱 깊이 일치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성모님의 칠고는:

1 – 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 35)

2 – 이집트로의 피난 (마태오 2:13-14)

3 – 아기 예수님의 실종 (루가 3:43-45)

4 –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성모님을 만남 (루가 23:27-31)

5 –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 (요한 19:25-30)

6 –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마르코 15:42-46)

7 – 예수님의 매장 (루가 23:50-56)


이 일곱 가지 고통이 성모님의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꿰뚫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는 종종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신 모습이나, 죽은 예수님의 몸을 무릎에 안고 계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분의 심장은 일곱 개의 칼에 찔린 듯 표현되며, 이는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거룩한 시메온이 예언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 2:35).


고통의 성모님께 바치는 신심은 본질적으로 성모님의 일곱 고통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묵상하며, 각 고통을 묵상한 후마다 성모송을 한 번씩, 총 일곱 번 바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경건한 전통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매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각 고통마다 성모송을 한 번씩, 총 일곱 번 바치는 이들에게 일곱 가지 은총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 신심은 성 브리짓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일곱가지 은총은:

1 - 나는 그들의 가족에게 평화를 주겠다.

2 - 그들에게 거룩한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주겠다.

3 - 나는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할 것이다.

4 - 그들이 내게 청하는 것이 내 사랑하는 성자께서 바라시는 거룩한 뜻이나 그들의 영혼의 성화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이 청하는 만큼의 은총을 베풀어 줄 것이다.

5 - 나는 그들이 지옥의 원수와 벌이는 영적 전투에서 그들을 지켜줄 것이며, 그들의 삶의 모든 순간마다 보호해 줄 것이다.

6 - 나는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눈에 보이게 도와줄 것이며,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7 - 나는 내 사랑하는 성자께 청하여 얻은 바, 나의 눈물과 고통에 대한 이 신심을 널리 알리는 이들은 이 세상 삶에서 곧바로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성자와 나는 그들의 영원한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성 브리짓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지를 살펴보지만, 아아, 그 수는 너무도 적구나! 많은 이들이 나를 잊는다 해도, 적어도 너는, 나의 딸아, 나를 잊지 말아다오.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라.”


가장 위대한 순교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순교자들의 여왕’이라 부릅니다. 이는 성모님의 순교가 다른 모든 순교를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육신은 고문자들에 의해 상처 입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성심은 사랑하올 아들에 대한 연민의 칼에 꿰찔렸습니다. 그 슬픔은 천 번 죽음을 당할 만큼이나 깊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모님의 슬픔은 너무나 커서,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 준다면 그들은 즉시 죽었을 것이다.” 성모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셨던 것처럼, 그분의 수난 때 성모님이 겪으신 슬픔도 그에 못지않게 깊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천 번 순교를 당하셨다 해도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셨고,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막기 위해 기꺼이 천 번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이 모든 별들의 광채를 능가하듯, 성모님의 슬픔은 모든 순교자들의 고문을 능가한다.”


마리아는 당신의 사랑하올 아들이 겪으신 고통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기둥에 묶이시는 모습을 보았고, 채찍질 소리를 들었으며, 순결한 육신이 그 잔혹한 매질 아래에서 뒤틀리고 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는 뜻이며, 이는 요한 19장 5절에서 빌라도가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을 군중 앞에 내보이며 한 말입니다)’ 장면에도, 갈바리아로 가는 길에도,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고통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무런 위로도,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성모님을 더욱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실 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셨지만, 그 거룩한 얼굴을 닦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갈증으로 바싹 마르고 핏기 없는 입술을 보셨지만, 시원한 물 한 모금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기대어 쉴 베개조차 없었지만, 성모님은 그것을 받쳐드리거나 품에 안아 쉬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끔찍한 무력감 속에서 이어진 세 시간 동안, 어머니로서 성모님이 겪으신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영혼의 상실

성모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의 또 다른 원인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인간의 배은망덕과, 그분의 귀중한 피가 헛되이 흘려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멸망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여왕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눈앞에 펼쳐지는 환시 속에서 인류가 용서받은 죄를 잊고 다시금 중죄에 빠지는 모습, 하느님께 대한 냉담함과 거룩한 것에 대한 혐오, 성사의 모독, 수많은 영혼들이 은총을 거부하고 남용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성모님 자신의 행복한 소천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주님의 수난은 복되신 성모님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졌습니다. 아그레다의 마리아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모님의 아드님이 승천하신 후, 성모님은 매주 금요일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셨으며, 이는 성흔의 은총을 받은 몇몇 특별한 영혼들이 겪는 고통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견디신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은 크나큰 은총의 원천입니다. 이는 우리 주 하느님께 매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인 작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통해, 마치 아드님께 어떤 의무를 지우신 것처럼, 그분께서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고통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는 구세주를 우리에게 끌어당기게 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의 고통을 경건하게 묵상하는 이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나스코의 복자 베로니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딸아, 네가 나의 수난을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은 나에게 기쁨이 된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내가 내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네가 어머니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은 더욱 귀중하단다.”


실로, 우리 구세주께서 이 신심보다 더 큰 약속을 하신 경우는 드물며, 그분께 더욱 기쁨이 되는 신심 또한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의 심판과 같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양심으로만 판단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급, 세속의 재화 축적은 여러분을 다른 사람보다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집에서 자신의 영혼을 팔았습니다. 아직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보속할 시간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죄를 벗고 모든 세속의 이득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주교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성 토마스 아퀴나스, 1972. 8. 21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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